건강한 음식 공부

감자2

해올777 2024. 7. 1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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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유럽인들의 주식인 빵의 재료이지만 전란과 가뭄 등 이상기후에 민감했다. 반해 감자는 척박한 환경에 뛰어난 구황작물이었다. 기르는데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고, 수확 후에도 별도의 가공이 필요 없었다.
오븐을 이용해 많은 연료를 소비하는 빵과 달리 감자는 냄비 하나만 있으면 요리할 수 있었다. 영양가 면에서도 훌륭한 식품이라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8개월 만에 수확했고, 고구마와 달리 장기 저장도 가능하다. 


겨울이 다가오면 가장 부담이 되는 가축은 돼지이다. 유용한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돼지는 먹기만 하고, 특히 잡식성이라 사람과 먹이경쟁을 벌이는 가축이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돼지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그때 유용한 것이 감자였다.
이전에 돼지는 추워질 때 번식용을 제외하고 도축하여 훈제나 염장을 해서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용으로 사용했다. 겨울철 사료가 부족한 관계로 상당수 도축해 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저장성이 뛰어난 감자가 들어온 이후 돼지 사육이 편해졌다. 겨울에도 사육두수를 증가시킬 수 있었고, 유럽인들의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도 늘어날 수 있었다.
사료로써 유용성 때문에 식용치 않는 지역에서도 재배 명맥을 이어갔고, 훗날 식용 전환 시 신속하게 재배 농가에 감자가 보급될 수 있었다.


-아일랜드
영국을 통해 감자가 전래했다.
17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가장 먼저 식품으로 받아들였다. 헨리 8세 시기부터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지 지배력을 강화했는데, 이때 영국이 아일랜드인들을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그 뒤 곡물 수탈 정책을 실시하자 식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영양상태가 좋아지자 아일랜드의 인구는 증가되었다. 그 이유로 감자 재배면적 역시 늘어났다. 이는 감자가 타 작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아일랜드 같은 척박한 환경하에서 감자는 매우 적합한 작물이었다.
18세기에 감자는 이미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단, 감자라는 단일작물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탓에 19세기 감자 흉작으로 인해 아일랜드 대기근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아일랜드는 여전히 감자를 많이 먹으며, 감자를 주식으로 감자 반찬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러 감자요리가 존재한다.


-독일
남미 개척에 참여했던 스페인의 이탈리아 출신 선원들에 의해 이탈리아로 감자가 전해진 이후, 독일로 전해졌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나폴리 그리고 독일을 통치하던 왕가는 합스부르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감자가 전해질 당시 독일 역시 감자에 대한 거부감은 다를 게 없었다.
하인 중에서는 감자를 먹느니 주인을 바꾸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30년 전쟁에 독일지역으로 참전했던 스페인 용병들은 군량미가 떨어지면 말 사료로 쓰던 감자를 대신 먹곤 했다. 그를 보고 배를 곯던 독일 농민들이 이를 얻어먹기 시작했다. 그 이후 점차 식품으로 받아들인 후 조금씩 재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전쟁을 거치며 감자가 구황작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적극적으로 감자 재배와 섭취를 장려했다. 독일지역은 농경 조건이 척박한 탓에 자주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감자 덕분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이룬 군사적 업적보다 고질적인 기근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를 ‘감자 대왕’이라고 부르고 그의 묘지를 방문할 때는 감자를 올려놓고 오기도 한다. 
프랑스는 2차대전으로 혹독한 시련을 경험해야 했는데, 독일인들의 체력은 주식인 감자에 있다고 결론짓고 프랑스인의 감자 섭취를 권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독일의 감자 소비량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앞선다. 
또 맥주, 소시지와 함께 감자가 떠오를 정도로 독일인의 빵과 함께 감자가 주식이 되었다.

-프랑스
17세기 초반, 올리비에 드 세르라는 농학자가 감자를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감자에 대한 거부감은 컸다.
감자가 나병을 퍼뜨린다며 재배 자체를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다. 이런 감자를 식품으로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한 사람은 농경 학자였던 앙투안 파르망티에였다.
7년 전쟁으로 참전했던 그는 독일에서의 포로 생활 중에 감자를 주식으로 먹은 경험이 있었다. 걱정과 달리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경험 덕에 감자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1763년 귀국 후 그는 감자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감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궁중 연회에 감자요리를 소개하며 시식회도 개최하면서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772년 파리 약학청으로부터 식용작물로 인정받았다. 재배금지법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왕궁에서 관상용 재배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자 장식으로 감자꽃 사용을 이끌어 내어 이미지를 개선했다. 그런 여러 결실 덕분에 프랑스 사회가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1785년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했을 때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식량부족 문제에 봉착한 프랑스는 감자 식용문화를 전역으로 이어갔다. 1794년 메리고라는 여성이 감자만을 주재료로 한 3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 요리책이 출판될 정도였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프랑스는 독일 국민이 체력적으로 더 우세한 이유가 감자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감자 섭취를 장려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프랑스의 연간 1인당 감자소비량은 125kg이다. 감자대국인 미국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의 2배를 넘는 양이다.


-기타 국가들
스웨덴 출신 룸포드 백작은 7년 전쟁에서 감자가 군대 식량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의 포메른 지역에서 감자를 가져가 스웨덴에 보급했다. 여러 요리법도 고안했고, 뮌헨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으며 ‘룸포드 퐁 수프’라는 요리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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