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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2)

해올777 2024. 7. 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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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역사


건국이나 초기 역사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의 융기문 토기와 타제 석창, 돌도끼 등 기원전 300년 이전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남 제주군의 상모리 패총에서는 한반도 육지부의 것과 유사한 민무늬 토기들이 발견됐다.
청동기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원형 주거 형태가 제주 삼양동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탐라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제주 용담동 유적에서 대거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이른 시기부터 제주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탐라인들은 서기 1세기까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남인도의 촐라 왕조와 활발한 무역을 벌였다는 것을 고고학적 증거로 알 수 있다. 왕국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서기 3세기에 쓰인 중국 정사 역사서인 삼국지이다. 그에 따르면 마한 서쪽의 큰 섬에는 주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한인보다 키가 작고 말이 한인과 같지 않다고 했다. 그들의 복식은 하의 없이 하나로 된 가죽옷이었고, 머리 모양은 선비족과 흡사하다고 적었다.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주호인들은 마한과 교역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주호가 서해의 작은 섬이었다고 주장하며 주호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문주왕 2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탐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문주왕은 은솔의 관등을 주었다. 탐라측 전승에 따르면 담왕이 다스리던 때였고, 복속을 의미하기보다는 독자적인 정치권력과 자율적인 외교권을 행사하던 탐라가 주도한 외교였다.
지운왕(483~508)의 치세에 해당하는 백제 동성왕 20년에 동성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며 탐라를 공격하기 위해 무진주까지 왔다. 탐라가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었고 백제군이 회군했다.

탐라 고씨의 전승에 담왕 때 신라로 보내는 탐라의 조공선을 가야포에서 가락에 약탈당하거나 검산포에서 백제구에 약탈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백제 외에도 고구려 및 신라와도 탐라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문자 명왕이 북위 세조에게 사신 예실불을 보내 전한 말이 있다.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은 섭라에서 난다.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기에 바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섭라를 탐라로 생각할 경우 탐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일찍부터 적지 않은 진주를 비롯한 물품들의 교역이 활발했고, 그것은 역학관계로 보아 정치적인 교섭을 동반한 것이었다. 백제가 고구려 공격의 후유증을 딛고 남부의 해상권을 회복해 나가면서 고구려와 탐라의 교역이 어려워져,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하려 한 것은 탐라에 대한 영향력 강화,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끊으려는 목적이었다. 탐라는 백제의 간섭으로 신라 및 고구려와 교역을 더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의 내법좌평 고진노가 와서 산천 지형을 사찰했다고 한다. 

일본과는 익왕(243~293) 때 갈나고라는 이름의 왜인이 탐라에 왔다는 전승이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야마토 시대에 탐라와 교류하기 위해 탐라에 견탐라사를 파견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탐라에서 왜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일본 견당사선이 우연히 탐라에 기항했고, 당군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탐라는 한동안 일본에 조공을 계속 보냈다. 또 508년 탐라가 백제와 처음 통교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다명왕(533~558)의 치세에 백제 성왕이 신라에 반격하기 위하여 탐라에서 병사를 낼 것을 요구했다. 수서(隋書)에는 당시 이미 탐모라국, 즉 탐라국이 백제에 부속되어 있다고 되어있다. 줄곧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 시기 신라가 황룡사 9층 탑을 세우면서 제4층에 탐라를 배열했다. 체삼왕(583~608)의 치세에 수의 전함 1척이 태풍으로 탐라에 표착했다. 탐라가 백제를 경유하여 돌려보냈다. 처량왕(658~683)의 치세에 이르러 백제가 멸망했다. 663년의 백강구 전투에서 당의 유인궤에게 항복한 자들 가운데 탐라의 사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탐라의 사신이 백강구 전투 이후 항복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백제 부흥운동에 탐라도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이후 탐라는 신라에 부속되었다. 신라는 탐라의 세 왕자에게 성주, 왕자, 도내라는 칭호를 주었다. 서기 7세기 후반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2년의 일로 탐라국주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했다고만 되어있을 뿐 탐라국주가 고씨 성을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영주지 및 성주고씨가전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이라는 고후, 고청, 고계 삼 형제가 탐진을 거쳐 신라에 입조했다는 기록이있다. 이 성주, 왕자라는 작호는 이후 탐라 군주의 칭호가 되었다.

남북국시대 동중국해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탐라국은 해상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9세기 신라 상인 장보고는 신라 국왕의 인가 아래 탐라와 완도를 거점으로 신라, 당, 일본 삼국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북쪽으로 일본 노토반도(이시카와현)와 쥬우산 미나토(아오모리현 고쇼가와라시)에서 남쪽으로는 광저우, 서쪽으로는 산동반도에 이르는 해상무역이었다. 항해 안녕을 위해 관세음보살을 모시기 위한 법화사를 탐라와 완도에, 적산법화원을 산둥반도에 건립했다. 

탐라는 935년 잠시 독립했다. 신라 멸망 후였다. 그러나 938년 고려에 다시 복속되었다. 제주 고씨 전승에서 민왕(908~933)이 고려에 사신을 부내 방물을 바쳤다고 한다. 자견왕(933~938)이 왕자 양차미와 함께 태자 고말로를 고려에 보내 입조시켰다. 고려 태조가 말로에게 성주, 왕자 작위를 제수하고 탐라의 궁실을 성주청이라 개칭했다.

1271년 고려 삼별초의 원나라에 저항하는 거점지가 되기도 했다. 1273년 원나라가 제주도에 남아있던 삼별초 세력을 제거한 후 탐라총관부를 설치, 원나라의 직할지로 삼고 말들을 기르는 목장을 세웠다. 제주인들은 몽골군을 목호라고 불렀다.
1374년 원나라가 멸망하며 목호의 난이 일어났고, 고려는 25000명의 군대를 보내 난을 진압한 뒤 탐라를 다시 고려의 직할지로 삼았다.

조선 태종 2년 성주 고봉례의 대에 이르러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으로 개칭되었다.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옛 탐라국의 잔재는 모두 사라졌고 조선 조정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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